하늘은 어떤 값을 주고 사도 쌈
10월 11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재능과 능력을 주셨단다. 준우, 찬우, 현우에게도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세상을 위해 사용하곤 해. 마치 자신의 재능이 너무 소중해서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아까운 것처럼 말이지.
만약 예수님께서 부와 쾌락을 가지고 오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영접했을 거야. 하지만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겸손과 온유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모습 그대로 말이야.
준우, 찬우, 현우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거야.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결코 쉽고 편한 길을 약속하지 않으셨어. 오히려 좁고 험한 길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몰라.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가난과 고난,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신 주님. 우리가 과연 그 사랑에 보답하기에 합당한 존재일까?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
사랑하는 아들들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르자. 비록 세상의 부와 명예를 포기해야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 가장 복된 길임을 잊지 말자.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기쁘게 걸어가자꾸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좁고 험한 길일지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같은 마음 주시길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높은 부르심(Our high Calling) 원문
하늘은 어떤 값을 주고 사도 쌈
능력과 재능이 있는 사람들 중 다수가 그리스도인의 길을 여행하기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의 재능과 능력은 위대한 시여자, 하늘과 땅의 주님께 바치기에는 너무 귀중하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들이 바라던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면 많은 사람이 그분의 추종자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 부와 쾌락을 가지고 오신다면 많은 사람이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고 서둘러 모든 사람의 주로서 면류관을 씌워 드릴 것이다. 그분이 굴욕과 고통을 제쳐 놓으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세상을 즐겨라. 그러면 그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외치기만 하신다면 수많은 무리가 그분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복된 예수님은 다름 아닌 온유하고 겸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이다. 우리가 내세에서 면류관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그분의 자기 부정과 고통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좁은 길을 넓게 만들지 않았다. 경건의 모양만을 쓰고, 십자가를 지거나 환난을 당하지 않을 길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우리 구주께서 걷지 않으신 길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제시하신 것과는 다른 본을 좇는 것이다. 성결의 기쁨과 하늘을 제공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늘의 더 없는 행복과 영광을 떠나셔서 가난과 깊은 고난의 생애를 견디시고 잔인하고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신 것이 충분치 않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그토록 위대한 자기 낮춤과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 무가치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속주가 받으신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서신 2, 1861년) 자기 부정과 십자가가 없다면 하늘가는 길은 얼마나 쉬울까! 세상 사람이 얼마나 많이 그 길로 몰려들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위선자가 그 길을 걸어갈 것인가? 십자가, 자기 부정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견디신 치욕과 수치는 그분의 피로 산 바 되어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굴욕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하늘은 실로 너무 값이 쌀 것이다. (서신 9, 18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