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함에 대한 해독제
1월 10일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한 신앙의 원칙 가운데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 냉담함과 무관심이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인내하며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기초가 되는 원칙들을 깊이 탐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대에 부딪히면 진리를 지탱해 주는 주장과 증거들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진실되고 살아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진지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성경 연구를 통해 훈련된다면, 지금은 한 명의 신자도 없는 곳에 수백 명의 진리로 개종한 이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무지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시편 119편 130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잠언 9장 10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만을 기초로 하지 않는 종교적 경험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구속의 계획에 대한 명확하고 영적인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진리가 그 본연의 단순함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편지 23. 1893).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간구합시다. 우리 마음에 진리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것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로 서서,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This day with God) 원문
냉담함에 대한 해독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결점도 없다. 만일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사실대로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실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멀리 떨어져서 따라간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신앙이 결핍된 이유는 그들이 그처럼 중대한 원칙들 가운데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들에 냉담함과 무관심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로서 어떻게 일해야 할지 인내하고 참을성 있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기초가 되는 원칙들을 깨닫기 위하여 깊이 탐구하지도 않은 채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반대를 당할 때 그들은 진리를 지탱해 주는 주장과 증거들을 잊어버린다. 진실 되고 산지식은 진지한 노력과 참을성 있는 활동에 의해서만 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새겨져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철저한 성경 연구를 통해서 훈련을 받게 되면 오늘날 한 사람의 신자도 없는 곳에 진리로 개종한 수백 명의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이교도들만큼이나 무지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에 대하여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 13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영감의 말씀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만을 기초로 하지 않는 종교적 경험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지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구속의 계획에 대한 분명하고도 영적인 제시가 필요하다. 진리가 사실 그대로의 단순성과 능력을 가지고 그들에게 제시되도록 하라(편지 23. 1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