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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시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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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위험함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 같이 할 것이요”(레 16장 16절).
10월 25일
사랑하는 그대여,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성경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사도들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빛과 깨닫게 하심을 고집스럽게 거절"함으로써 구원의 기회를 놓쳤어요. (서신 38, 1896)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초대를 받고 있지만, 때로는 내 고집과 욕심을 내려놓지 못해 그 초대를 거절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에요. 그 사실을 믿는 순간, 우리는 새 힘을 얻게 될 거예요.

사랑하는 그대여,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는 그대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음성에 귀 기울이는 지혜로운 그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그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대의 삶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할까요?

사랑의 하나님, 제 마음에 교만과 완고함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승리하시는 그리스도(Christ Triumphant) 원문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위험함

우리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어떤 증거가 주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완강하게 하나님의 성령을 물리쳤는지 볼 수 있다. 우월한 지혜와 경건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다른 세력에 의해 그들의 마음이 꼴지어지도록 허락하고, 성령께 대하여 저항하는 길을 따라나간다면 대단히 두렵고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실수들을 범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해 대표되는 주 예수님은 (사도들을 심문하고 있었던 제사장들)의 그 회집에 임재해 계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동안,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느꼈었지만, 그들은 양심을 짓눌러 버리고 이전보다 더 눈이 멀고 강퍅해졌다.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다며 사도들이 그들에게 퍼부은 두려운 고발 가운데서조차도 회개로의 또 다른 초청을 보내셨었다. 그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끊어놓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 죄만이 아니라 성령의 빛과 깨닫게 하심을 고집스럽게 거절한 데 있었다. 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그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증언을 주시는 데 사용하고 계셨던 사람들을 학대하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악의적인 반역이 다시 등장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과, 그분께서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주셨던 기별을 연속적으로 저항하는 행동 가운데서 더욱 완강해졌다. 저항의 행동을 할 때마다 굴복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백성의 지도자이기에,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들이 취해온 길을 변호하는 것이 그들에게 지워진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바른 쪽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스도께 반대하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에, 모든 저항의 행위는 같은 길을 고집스럽게 따르도록 하는 또 다른 유인물이 되었다. 그들이 과거에 반대한 사건들은 귀중한 보물로서 빈틈없이 수호되어야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을 하도록 부추겼던 적의감과 악의는 사도들에게 집중되었다. 하나님의 영은 대중들의 두려움이나 총애를 개의치 않고 그들에게 위탁된 진리를 선포했던 사람들에게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셨다. 성령의 능력의 현시아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외고집은 더욱더 완강해졌으며, 영혼을 파멸시켰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굴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신 38, 1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