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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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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희롱함

“너의 모든 정가를 성소의 세겔대로 하되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할지니라”(레 27장 25절).
11월 6일
오늘 이 시간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엔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죄를 범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거나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는 놀라운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 앞에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한두 가지 계명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모든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요한일서 2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참된 신앙인의 삶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통치자들과는 거리를 두셨지요. 진리는 화려한 곳이 아닌 소수의 겸손한 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사들 역시 권세있는 자들이 아닌 기쁜 소식을 겸손히 받아들일 준비된 이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신분이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경건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때로는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완고함과 교만함으로 두려운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의롭다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신 35. 188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을 세워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며 묵상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사랑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주의 계명을 지키며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희 되기를 간구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말씀 안에서 겸손함을 배우고,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This day with God) 원문


죄와 희롱함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리라는 희망에서 감히 많은 죄를 마음대로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시험하거나 나름대로 추측해서는 안 된다. 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를 멀찍이 따라가려고 하면서 파멸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가능한 한 파멸의 가장자리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슬픈 결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행하신 일은 정말 놀라운 희생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위해 무엇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 5)고 하셨다. 하나나 둘 또는 아홉 가지만 지킬 것이 아니라 열 가지 계명 전부, 곧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체하면서도 그분의 요구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 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 3).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자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분께서는 학식 있는 랍비나 통치자들과 자리를 같이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주권자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시고 천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진리는 결코 다수 가운데서 발견되지 않았다. 진리는 항상 소수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은 선지자의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성전이나 회당에서 저들의 찬송을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기별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겸손한 사람들에게 나아갔다.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과 통치자들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위에 온전히 만족하여 저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경건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므로 흑암에 빠져 있을 때 베들레헴 광야에서 구주가 나셨다는 기쁜 소식의 노래를 불렀다. … 위대하고 훌륭한 사랑들은 완고함과 자존심에 빠져 두려운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다고 자랑할지도 모른다(서신 35. 1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