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의심과 불신의 씨를 뿌리는 사단의 일을 하고 있음
9월 15일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 모습이 있진 않나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한복음 3:20) 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죄와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빛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꺼려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한복음 3:21)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여는 시간 가져볼까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 안에 있는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해주세요. 유다처럼 의심과 불신의 씨앗을 품지 않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 되게 해주세요. 저희의 모든 재능과 은사를 주님께 드리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승리하시는 그리스도(Christ Triumphant) 원문
우리는 의심과 불신의 씨를 뿌리는 사단의 일을 하고 있음
유다는 제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풍채가 당당하였으며 탁월한 자질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천부의 재주들은 성화되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았다. 유다는 그의 마음의 방들, 심령의 문을 사단의 유혹이 들어오도록 역었다. 그의 정력은 자기 잇속을 차리고 자기를 높이고 돈을 사랑하는 데 바쳐졌다. … 그리스도의 영과 생애로부터 분리된, 그 가련한 독립적인 영혼을 괴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는 항상 정죄 아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훈들이 항상 그를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변화되고, 참 포도나무와 연결됨을 통하여 산 가지로 변모되지 않았다. 오, 만일 유다가 제시된 원칙들 가운데 명백하게 제시된 이 거룩한 교훈 아래서 하나님 앞에 그의 마음을 낮추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했다면 그는 그의 동료 제자들에게 유혹자로 남아서, 그들의 심령에 더 이상 불신의 씨를 뿌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단은 유다의 심령과 마음에 그가 형제들에게 전해주었던 씨를 뿌렸다. 유다는 마귀로부터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의심을 그의 형제들의 마음에 전해 주었다. 그는 형제들에 대하여 대단히 많은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훈들을 상쇄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를 마귀라고 부르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일은 없다.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그분께 자신이 행한 일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연결된 데 대하여 특권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공언에만 그치는 신앙을 가지 그 제자는 참된 제자와 구분된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진리를 받아들여진다 해도 영혼을 구원하는 데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실제 생활에 실천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드러낼 것이다. 그가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기를 꺼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즐겨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생명의 떡을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그는 견책을 싫어한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빛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듯이 자신들을 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원고 67, 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