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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높은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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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료됨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창 47장 8절).
12월 3일
사랑하는 준우, 찬우, 현우에게

오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구나.
준우, 찬우, 현우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있단다.
우리는 때로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해. 멋진 장난감, 좋아하는 게임, 친구들과의 놀이에 푹 빠지다 보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지.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단다.

준우는 벌써 중학생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깨닫고 있을 거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늘나라에 아름다운 집을 준비하고 계셔.
그 집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지 않니?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진 것들, 집이나 물건들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게 해서는 안 돼.

찬우와 현우도 귀 기울여 들어 보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어.
그 약속들을 늘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어.
기도로 힘을 얻고, 예수님과 함께할 그날을 기대하며 기뻐하자꾸나.

사랑하는 아들들아,
예수님은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거란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바라보면, 너희 마음이 그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거야.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하늘에 속한 귀한 것들을 사모하게 될 거란다.
그렇게 변화된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도 하늘 보화를 사랑하도록 이끌 수 있단다. (서신 97, 1895년)

우리 함께 기도해 볼까?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기 원합니다.
준우, 찬우, 현우가 예수님 안에서 자라나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높은 부르심(Our high Calling) 원문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료됨

우리의 사랑을 모두 빨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세상적인 어떤 대상에 애정을 두라는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에서 돌아설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러 가신 집을 마음에 떠올려야 한다. 집과 땅, 사업 거래와 세상 계획들이 우리와 우리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기록에 남기신 풍성한 약속들을 항상 마음에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현 시대를 지적해 주는 위대한 길잡이를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저 위대한 날에 벌어질 투쟁을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도록 아주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러 가신 집에서 예수님과 곧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기뻐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대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으시다. 그대는 그분을 바라볼 때 그분의 거룩한 사랑이 가지는 풍성한 영광에 매혹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우상 숭배와 같은 사랑은 썩지 않는 귀중한 사물들에 대한 더 높고 더 나은 사랑으로 대체될 것이다. 영원한 부요(富饒)를 명상하면 마침내 그대의 애정은 위에 있는 사물에 묶일 것이며, 그대는 애정을 하늘의 보화에 두도록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돈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진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데 그리고 돈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원수의 세력에서 그들을 구할 때, 돈이 갖는 효용성을 아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면 세상 사물에 대한 사랑이 제거된다. 그는 하늘 사물들이 지닌 뛰어난 영광을 보며 영생에 관계되는 것의 탁월성을 이해한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매료된다. 세상적인 것을 움켜쥐었던 손이 풀린다. 다른 세계의 영광들을 보고 감탄하며 눈을 고정시킨다. 시련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그를 위해 이루어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그가 누릴 수 있는 부요와 대조해 볼 때 그는 그 시련들을 그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으로 간주한다. (서신 97, 18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