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에서 우리의 운명이 저울에 달려 떨었음
9월 16일
우리는 삶에 지쳐 기도할 여유조차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를 청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탁을 외면한 채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39)
이 기도 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로 물들이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사탄과 싸우셨고,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그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도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지치고 힘들 때에도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고, 기도로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길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은혜가 저희 삶 가운데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승리하시는 그리스도(Christ Triumphant) 원문
겟세마네에서 우리의 운명이 저울에 달려 떨었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과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떠나시면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이 세 제자를 택하시고 동산의 격리된 곳으로 더 나아가셨다. 이 세 제자는 그분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늘의 방문객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이 경우에도 그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동정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셨다. 그리고는 돌 던질 만한 곳만큼 그들로부터 물러나셔서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초인간적인 고뇌와 더불어 씨름하고 계셨던 그분은 인간적인 동무를 갈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다. 그러나 그분은 실망하셨다. 그들은 그분께서 그들로부터 얻기를 기대하셨던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뇌에 찬 기도를 들어보라! 제자들이 감람나무 가지 밑에서 자고 있는 동안 인자 -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시는 분 - 는 차디찬 땅바닥에 엎드러지셨다. 영혼의 고민이 그에게 닥쳐왔을 때, 커다란 피 땀방울이 그의 털구멍에서 밀려나왔다. 그리고 내려 깔리는 이슬은 겟세마네의 풀밭을 축축이 적셨다. … 여기 신비스러운 잔이 그의 손에서 떨렸다. 여기서 잃어버린 세계의 운명이 저울에 달려 있었다. 그분이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씻어버리고 무죄하고 그럴 만한 일은 조금도 안 하신 자신의 공의로운 율법의 형벌 아래 놓고 있는 멸망해 가는 세상의 죄책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뽑아 던지실 것인가? 그분이 죄인의 대속주와 보증인이 되기를 거부하실 것인가? 그들에게 또 다른 기회, 또 다른 유예의 기간을 주기를 거부하실 것인가? 아버지로부터의 분리, 범죄와 죄에 대한 형벌이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하고 불변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분에게 떨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변개할 수 없는 성격에 관하여 하나님의 왕자와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그 쟁론을 영원히 종결지을 것이었다. 하늘의 폐하께서는 고뇌로 당황해 하시는 것 같았다. 어떤 인간도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쟁투를 예측하셨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었다. 이제는 그 “때요 어두움의 권세”이다. (원고 42, 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