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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높은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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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훈련소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말째 아우가 함께 하면 내려 가려니와 말째 아우가 우리와 함께함이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창 44장 26절).
9월 15일
준우, 찬우, 현우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인 십계명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이제는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를 거야.
마치 넓은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말이지.
우리 가족이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이 꼭 필요해.
준우는 벌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많이 깨닫고 있을 거야.
찬우와 현우도 차츰 알아갈 수 있을 거란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명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배우기를 원하셔.
그 중에 다섯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부모님께 순종하라고 하셨어.
하나님은 엄마 아빠가 너희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인내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라셔.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쁘게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거란다.
사탄은 우리 가정이 사랑 없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좋아할 거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욱 굳게 뭉칠 수 있어.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려고 해.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면 이 땅에서도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거야. (서신 34, 1894년)
자, 이제 함께 기도해 볼까?
사랑의 하나님, 우리 가정이 주님의 계명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준우, 찬우, 현우가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기쁘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이 이 땅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높은 부르심(Our high Calling) 원문


가정 훈련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가르쳐 왔다. 정말 폐지되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품성의 표준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 사항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표류하지만 가족 관계의 엄숙한 책임을 다루는 일을 위한 아무런 지침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가 동료 인간들을 취급하는 일에 대한 훈련을 받는 것은 가족 관계 내에서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을 규제할 아무런 법도 갖고 계시지 않다면, 그것에 맞추어 인간 가족이 그들의 품성을 형성할 본으로서 그분의 품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무엇이 인생의 옳고 바름과 품성의 완전을 구성하는지에 대해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을까?… 다섯째 계명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한다. 소년기와 청년기 전체에 걸쳐서 부모는 순종을 요구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과 협력하여 해야 할 부분을 행함으로 자녀들이 이 계명을 지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모 자신 또한 규칙 아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자녀 앞에 본을 보이고 확고부동하게 결합된 인내와 관용을 나타냄으로 귀중한 품성의 특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자녀들이 하늘 아버지를 순종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사단은 무질서하고 통제가 잘 안 되는 가정을 바라보고 기뻐한다. 이는 그의 성공은 대체로 그가 지상의 가족들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그는 기어코 의의 표준이 품성 형성의 규준이 되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다. 십계명은 하늘의 하나님에게서 이르러 온다. 그분의 심령은 사랑이 충만하여, 그분은 지혜가 무한하시며 결코 실수함이 없는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로우셔서 잘못하지 않으시고 선하셔서 그분의 요구 사항을 순종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해하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법을 순종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뒤따를 것이다. 이생에서 부모와 자녀의 행복과 평강과 그들의 최선의 유익은 그분의 법도 안에 행함으로만 이룩될 것이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과 조화되기 때문이다. (서신 34, 1894년)